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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할만한 시선/주목할 만한 시선, 책

<44> 바람 목소리 /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by TheExod 2022. 4. 27.

 

 김창생(金蒼生) 작가의 장편소설 ‘바람 목소리(서원오 옮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출판 / 일본에서는 2020년, '바람의 소리 風の聲'로 출간)'는 제주 4.3 사건의 살육광풍을 피해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떠난 쌍둥이 자매 설아와 동아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주 4.3 사건과 이를 피해 일본으로 떠나야 했던 재일동포들의 삶의 여정을 기본 토대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일본어로 쓰여진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올 수 있던 것은 서원오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이하 시민모임 봄) 사무국장이 직접 번역을 맡고, 기획해 시민모임 봄의 사업으로 추진해서다. 

 작가는 일제강점기와 1948년 그리고 현재라는 시간, 제주도와 오사카 이카이노의 공간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소설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던 타국 땅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의 삶이 담겨있는 오사카 이카이노 조선시장으로 안내하고, 제주에서 국가 권력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살육의 기억까지 때로는 힘있게 때로는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 극우단체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재일조선인을 향한 혐오발언 집회까지 작가는 나즈막이 꺼내어 펼쳐놓고 있다.

소설 속에는 1951년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나고 자란 뒤 귀국해 제주도에서 살았던 작가의 삶이 녹아 있어 글의 풍미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지고, 조선적을 가진 채 일본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금 이순간에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현실이 녹아있다.

 연극이나 뮤지컬에서 극이 전환되듯, 소설은 제주와 오사카를 오가며 여러 사건과 이야기를 눈 앞에 펼쳐놓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자행된 대규모 학살 사건을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인 만큼, 가슴 아픈 이야기에 차마 다음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숨을 내쉬어야 했다. 책을 읽을 때면, 드라마를 보듯이 머릿 속에서 나름대로 장면을 구성하는 내게 제주 4.3 사건 이야기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가하면 소설 속 오사카 이카이노 조선인 동네의 풍경은 뭔가 퍽 정겹다. 어린시절 뛰놀던 골목 어귀가 생각나게 하는 풍경들과 인물들이 소설 속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다.

 오사카 이카이노. 일제강점기에는 제방공사를 위해 조선인들이 동원돼 마을이 형성됐고, 제주 4.3 사건을 계기로 수 많은 조선인들의 피난처이자 제주 도민들의 '디아스포라'였다. 지금도 일본 내 재일동포의 최대 밀집지역이지만, ‘돼지를 치는 곳’이란 뜻의 지명 ‘이카이노’는 1973년 홀연히 사라져 이코쿠구 속 코리안타운으로 남아있다. 

 재일조선인들의 역사는 끝없는 차별과의 투쟁의 역사라고 말한다. 조선학교를 지키기 위한 4.24 사건을 비롯, JR승차권 할인 적용 투쟁, 치마저고리 습격사건, 교토조선학교 습격사건 등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무수한 차별에 대항해 싸움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하나씩 획득, 일본사회를 변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조선학교만을 제외한 고교무상화 정책, 조선학교 유치원에 대한 무상화 제외 조치 등 아직도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들을 향한 차별이 계속되고 있다. 

 요즘에서야 재일조선인, 조선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존재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책을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아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이다. 좀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재일조선인과 제주 4.3 사건 등에 대해 알게 되길 바라본다.

김창생 지음, 서원오 옮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봄, 231쪽 , 1만6천 원.

 

* 제주 4.3 사건 *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를 구경하던 민간인을 향해 경찰이 총격을 가했다. 민간인 6명이 목숨을 잃었고 8명이 중상을 입은 '47년 3.1절 발포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항의해 남로당 제주도당의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과 제주 도내 관공서와 민간기업 95%, 166개 민관단체가 함께 참여한 3.10 민·관 합동 총파업.

 일련의 사태 원인이 '경찰 발포'보다 '남로당 선동'에 초점을 맞춘 미군정은 제주도지사를 비롯한 제주 도내 수뇌부를 전원 외지인들로 구성하는 한편, 서북청년단원과 외지 경찰을 파견해 강공 정책을 펼친다.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으로 한 달만에 500여 명을 체포하고 이듬해 4.3 사건 발발 직전까지 2,500명이 구금됐고 제주 도내에서는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같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결국,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후 남한에서는 5.10 단독 총선거가 진행됐고,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됐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됐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 설치, 11월 17일에는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에 앞서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했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됐다.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됐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된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된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4·3사건은 7년 7개월만에 끝을 맺었다.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1999년 12월 2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이후 2003년 10월 15일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됐고,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제주4.3연구소 자료 발췌, 편집, http://www.jeju43.org